[問]던지다

옛포스트]일상에 실패하다

진주로부터 2017. 12. 21. 20:46



젊은 날 나는 

사랑에는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다며 교만하게 굴었다.
첫사랑조차 '첫'이라는 수식어로 하여 사랑이 아니라 고집했다.
그런 사랑에, 더구나 노력이라니.

그건 위선이거나 자기합리화이거나 선택을 정당화하려는 아집임이 분명해보였다.

노력해야 하는 순간 그건 이미 내겐 폐기되어야 할 '감정'이 되어버렸다.
하여 나는 늘 사랑에 실패했다.

내가 사랑에 무지했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우연의 일치나 상투성이 소설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지만 

삶은 때로 소설보다 더 상투적이며 우연은 종종 남발된다. 

알랭 드 보통의 첫 소설책을 건네받았던 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소설의 결말이라 할 만한 <낭만적 연애와 그후의 일상>이 올해 발표되었다.


삶이, 말하자면 '성공적'일 때 흔히들 쓰는 

"이제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는 관용적 표현이 있다.

새 길로 접어들면서부터 나의 시간은 지난 삶의 뿌리를 흔들기 위한 안간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흔들고, 흔들어놓고, 그리고 떠나고 싶었다.

송두리째 뽑혀 마침내 초라한 나뭇잎으로라도 바람에 불려가고 싶었다 아아 진정 나는 가진 것이 없어도 좋았다....

뿌리 뽑히고 싶었다. 나를 뽑아내고 싶었다.

묶인 팔도 풀고, 다리도 풀고, 그리하여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대지에 묶여 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나는 태양을 향해 굴절하는 가지와 땅속 깊이 천착하는 뿌리만을 가졌단 말인가.

뻗은 가지는 무겁고 지난 삶의 뿌리는 너무나 집요하다.

내 몸 하나 가벼이 하지 못한 내가 누구를 응원하며 누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나는 그래서 그 길을 포기했다.


그러나 사랑에서만큼은 다르다.

내가 준 것과 받은 것의 총량은

내가 잃은 것과 포기한 것과 인내했던 것보다 아주 많이 크다.
내 미성숙한 인격이,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폐기되지 못한 자기애가
혹은 극복하지 못한 어떤 트라우마가

더 이상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절망과 자기혐오 속에서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사랑이었지만 일상에 실패했다.
그게 진실이다. 


낭만적 연애가 삶 속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가치와 충돌하며 그리하여 어떻게 약속을 전복시키는지 알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탓하자.


그러니 지금도 여전히, 충분히 학습되지 못한 그 행위로 고통받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더는 비난하지 않기로 한다. 

인생을 바꾼 어마어마한 일을 짐짓 농담이었다고 쿤데라처럼 눙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기는 아니었다는 면죄부는 스스로에게 줄 수 있다.


지금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비겁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벌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이성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깊게 숨을 내쉰다.

날은 어두워지고 바람이 분다.





'[問]던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어졌다  (0) 2018.01.12
변태하다  (0) 2018.01.12
글쓰기는  (0) 2018.01.12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부쳐  (0) 2017.12.26
그 사랑, 그 이별  (0) 2017.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