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14 08:49:10
권여선 作 「봄밤」을 이 9월에 다시 읽다.
그 사랑이, 그 이별이 끔찍하다.
그리고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된다.
세상에는 이런 이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작가가 보여주었으므로 그런 이별이 있다고 믿고 싶다. 책을 덮으며 서러움에 오래 울었다.
소설 작품을 '낱낱이' 해부하던 이전 습관을 이제는 버린 것 같다.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장편을 쓰려다 시간에 쫓겨 단편으로?),
그 인물들이 작가의 내레이션으로만 감정을 드러내고 생각을 드러낼 뿐인 게 치명적 흠이었는데,
그렇게 시점이 마구 흔들리면 또 어떤가.
누가 어쩌고저쩌고, 저랬다더라 그랬다더라, 하는 서술도 있는 법이다.
작가가 마음대로 한번 써볼 수 있다.
이론은, 작품과 또 독자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분석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깊이 ‘감정이입’ 됐다.
지금 다시 읽어도 눈물이 난다.
자꾸 눈물이 난다.
습작 시절에도 안하던 짓을 한다.
여기 옮겨본다.
모텔 주인의 신고로 의식불명인 영경이 요양원의 앰뷸런스에 실려 왔을 때는 수환의 장례가 다 끝난 후였다. 영경은 이틀 만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온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영경은 수환에 대해 묻지 않았다. (중략) 영경은 알코올성 치매로 인한 금치산 상태에 놓였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자신들이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갚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종우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거듭 묻는데도 영경은 오랜 시간 울기만 했다.
나는 내적 고요라고 할까 고요한 질서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삶을 지향하며 작가가 되고자 했던 것이지 삶의 목표나 목적으로서 문학을 택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그걸 인정하고 나니 편해졌어요. 흔히 쓰는 '작가답다'는 말의 함정이랄까 질곡을 경계하고 무시하려고 하지요. 어떤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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