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존재들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실어가는 이 거역할 수 없는 격변의 세월에 휩쓸려서 내 인생의 황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격렬한 아픔이 있었겠는가. 비록 우리가 떨어져 살았다고 해도, 회환과 열정과 비난과 한스러움과 실망, 이러한 감정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우리를 연결해 주는 데 한 몫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감정들이 존재할 자리마저 사라졌다. 게임은 싸우는 사람이 없으면 중단된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싸우기도 했던 우리의 영토에는, 이제 몇 폭의 그림들만이 살아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 그림은 아마도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가진 온갖 비밀들, 두 사람이 은밀히 주고받았던 의미 있는 말들, 저 현란한 색채들에 갇혀 있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크리스틴 오르방, <세상의 근원> 중에서
작품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세상의 근원'이 여자의 자궁이라는 설정은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나 픽션과 넌픽션이 교묘하게 뒤섞인 이 짧은 소설은 그림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자크 라캉도 마송의 <에로틱한 대지>를 데생 가면으로 덧그려 이 작품을 가렸듯 나도 서가에 버젓이 꽂아놓기 머슥했던지 표지를 뒤집어 두었다. 책 속 그림을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 놓았는데 세월이 지나 테이프의 접착제는 날라가고 자국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대하게 된 그림인데 어느덧 폐경기까지 지난 늙은 여자라서인지 피식 웃음이 난다. 이게 뭐라고. 쿠르베의 이 그림은 실제로 외설과 음란물의 혐의를 벗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심지어 포르노처럼 작품명을 <X>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페이지, 모델 조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나는 그 그림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 뒤로 37년 동안 어떤 흔적도 어떤 울림도 어떤 사진도 없었다. 그 그림 <세상의 근원>은 사라졌다. 나는 아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그 이름을 소리내어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감히 오트페유 가(街) 한 모퉁이에서 지냈던 내 추억 속을 헤집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인생에서 그 에피소드가 잊혀졌다고 믿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가 그 그림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가.내 지나간 삶을 내버리고, 남프랑스 미디에서 ( '미디에서'가 아니라 '미디에'가 맞다. '미디에서'는 살다를 수식한다. 바로 뒤 유폐되다를 수식하는 건 '미디에'가 맞다. 이런 쓸데없는 교정질.) 유폐되어 사는 내 삶은 바로 수치심에 떨던 그날 밤에 비롯되었다. 나를 표현하는 이미지와 함께 더 이상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떠났다. 아무도, 어떤 곳에서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그 밤에 나는 홀로 떠났다. (끝)
다시 읽어 보아도 멋있는 여자 조안나 히퍼넌, 그리고 크리스틴 오르방. 루 살로메가 했다는 이 말이 퍽 어울린다.
"창작욕이 강한 사람들은 에로틱한 사랑의 동반자가 되는 데서는 확고한 존재의 안정감과 행복감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들의 생명력은 '현실 속 동반자'가 아니라 '작품 속 동반자'로 흘러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