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던지다

대처의 추파

진주로부터 2020. 1. 7. 15:17

 

 

 

2019년 발표된 김애란의 [비행운]에 실린 단편 <큐티클>에는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인용해 달콤한 아이스모카 혹은 카라멜마키아토를 묘사하는, 전혀 감미롭지 못한 대목이 등장한다.

 

서울의 감미, "대처의 추파".


글쓰기 선생들이라면  OO의 OO,  이렇게 국적 불명의 소유격조사 '의' 두 개로 이루어진 조합을 두고 쯧쯧 혀를 차겠으나 어쨌거나 대단한 은유 아닌가.

 

1973년 여름 서울 안국동 종로경찰서 앞 한국걸스카우트연맹 회관 옆에는 딱 붙은 껌 같은 작은 퍼모스트 아이스크림 가게가 하나 있었다.

 

모 여자중학교 걸스카우트 담당교사로 지목된 (말인즉 그 학교에는 걸스카우트 자체가 없었으나 행사용으로 급조되었다는 뜻이다) 무용과 추영희 선생의 특별 배려 하에, 노란 삼각 스카프를 두르는 진초록 원피스의 걸스카우트 단복을 학교 경비로 급히 맞춰 입고, '한일 친선 걸스카우트 야영대회'에 지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생전 처음 서울에 온 시골 여중생 하나가 그만 홀딱 반했던,  '주고싶은 마음 먹고싶은 마음'의 맛이 바로 대처의 추파가 아니었을지.

그녀는 서삼릉에 있는 보이스카우트 캠핑장(걸스카우트연맹은 캠핑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으로 떠나기 전 회관 꼭대기 내무반(?)에 머무는 며칠 동안 야영대회에 가서 쓰라고 어머니가 짐 보따리 깊숙이 넣어주신 오백원짜리 동전(당시 갓 나온 은화!) 몇 닢을, 오똑한 스테인레스스틸 컵에 담겨 나오는 그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데 다 탕진하고, 함께 상경한 같은 재단 산하 선명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떤 언니에게 빌려서까지 사먹게 되었으니 그 맛은 가히 영혼을 팔아도 좋을 맛이었던 것.

 

시골로 돌아와 빚독촉을 호되게 받았던 그 여중생은 남에게 절대로 돈을 빌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라도 얻었으려나. 감미로움에 취해서는 안된다는 교훈도 함께.

모를 일이다. 교훈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생활이 궁핍해지면 누구나 돈을 꾸고, 대출을 받고,  채무 상환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이다.  


단발머리 시골 여중생은 충격적인 '대처의 추파' 앞에 자신은 커서 반드시 달달한 서울로 가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자라서 무려 서울대학생이 되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박정희 정부 시절 모 부처 차관을 아버지로 둔 친구를 만났고,  그녀와 단짝이 된 그 친구는 이 치명적인 단맛의 미국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을 팔던 대일유업이란 회사가  (주)빙oo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 회사를 계열사로 거느리는 대한민국 어느 재벌가의 사모님이 되셨겠다.  하여 그녀는 아주 자주,  친구가 박스째 갖다주는 새콤달콤한 빙oo  요* *를 먹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달콤한 서울에서 달달하게 행복하게 잘 살았더랬을까.

 

행복한 결말은 상투적이고 식상하다

이제 환갑을 앞둔 그녀들이 신분차(?)를 극복하지 못한, 혹은 열등감과 우월감의 충돌이 빚은 파국적 결과로 수 년째 안 보고 지내고 있다는 소설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관찰자는 서울의 단맛이 꿀이나 조청과는 다른 가공의 맛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베스킨라빈스 창업자의 아들 존 라빈스는 결코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는 괴담 같은 이야기도,  (주)B가 계열분리를 통해 이제 더는 사모님과 상관없는 시동생회사가 되었다는 실화도 다 남의 얘기다.  

 

단편 <큐티클>에서 '나'는 여전히 단맛에 더 끌렸고, 친구의 목마름을 위해 거금을 들여 관리 받은 손톱을 사용해 맥주 캔의 알루미늄 따개 부분에 과감히 손가락을 갖다 대었고, 손끝에 힘을 줘 딸각 따개를 들어 올리고야 말았으니, 탄산이 빠져나오는 소리와 함께 검지 손톱은 결국 찢어져 버렸지만 둘은 어쨌든 함께 앉아 맥주를 마셨고, 친구가 '나' 대신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으며, 드르륵 드르륵 캐리어 바퀴 소리를 뒤로 하며 함께 남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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