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게 파리 여행하기가 시나브로 시작되었다. 반 강제로.
11월 22일 오전 1:45 페북에 올린(그것도 처음으로) 그 간략한 포스팅을 끝으로
내 폰은 동네(?) Zara home 쇼핑몰에 잠깐 들렀을 때 사라지고 말았으니.
아침부터 조금 무리하긴 했다. 며칠 혼자 다니면서 자신감이 붙어 여유를 좀 부렸는데 호텔 가까이 있는 역으로 가니 아뿔싸 1호선이 아니라 9호선이었다. 미처 확인을 안 했던 것이다. 1호선으로 환승하거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까지 한 정거장을 걸어가서 타야 한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초조해진 나는 예약시간에 늦으면 큰일이므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예측이 안됐다. 우선 말이 안 통할 테니 우길 수도 없을 터였다) 일단 지하철을 포기하고 루브르까지 걸어가는 기백을 토해냈다. 8구 샹제리제에서 출발해 1구 거의 끝까지, 콩코드광장을 지나고 , 그러다 방향을 약간 잘못 짚어 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와, 그 와중에 세느 강에서 제일 아름다운 다리라니 알렉산더 3세 다리 사진 하나 찍고, 드넓은 뛸르히 가든을 뛰다시피 해 가로질러 (아침 시간 너무 한적해 조금 무서웠다) 그 유명한 루브르 유리 피라밋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과 뿌듯함을, 아마 잊지못할 것이다.
아슬아슬 카루젤 루브르 쇼핑몰 근처에서 가이드와 접선 했고, 장장 네 시간에 걸친 루브르 투어, 그리고 4구에 있는 퐁피두센터까지 섭렵하고 다시 걸어서 호텔로 돌아온 날이었다.
집에 오는 길은 너무 힘이 들어 더욱더 지치곤 해~~
어쩌면 집중력이 떨어져 소매치기를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피곤도 피곤이려니와 시차 상 가장 졸린 시각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그런 상황이었다면 빠르게 대처했을 텐데 우선 머릿 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참 멍청하게 굴었다. 중요한 저녁 약속을 앞두고 있는 제자가 당사자인 나보다 더 이리저리 찾으러 다니고, 나는 자꾸 딴소리하고 (그랬단다^^), 그러다 결국 그녀는 내게 화도 못내고 혼자 끙끙 앓았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물론 나도 그녀가 약속에 늦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했다. 그리고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할까 신경쓰느라 내색도 못했다.
서로 속으로 생각만 하다가는 오해도 생기는 법이다.
우리가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혜경에게 나는 영원한 쌤이었다. 오십이 넘은 '늙은' 혜경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만났던 우리, 그리고 과외선생님과 제자로 만났던 우리가 겪은 첫 트러블이었다. 물론 그 일로 아주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어쨌든 남은 사진이라곤 그날 페북에 올린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틈틈이 친구들에게도 보내고 페북이며 카톡에도 많이 올릴 걸 하고 많이 후회했다.
해외 로밍 가격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사실 그게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지도 않았으면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구글 포토에도 남아 있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나 멘붕 상태는 잠시, 신기하게도 하루 지나 곧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여행을 위해 준비를 꽤 했다고 생각했다.
소용이 닿든 안 닿든 준비해보자 했던 것인데, 그것들이 정말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다음날부터는 휴대폰 없이 무식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구글 지도도, 번역기도, 인터넷 검색도 없이 맨손 맨발로.
아날로그 세대 특유의 불안 때문인지 어떤 불길한 예감이 있었던 것인지
나에게는 아직도 자료를 출력해서 가져간 프린트물 몇 장이 남아 있었으니....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호텔을 중심으로 한 이 지도였다.
한 장에 다 들어갈 수 있게 크기를 조절해가며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며 애써 출력했는데
이게 없었으면 그렇게 씩씩하게 못 다녔을 것이다.
파리 전체를 개괄하는 이 간략한 지도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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