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하나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숲속의 작은집>에 등장하는 예쁜 여자 탤런트는 2박 3일의 숲속 생활에 낑낑대며 트렁크 두 개의 짐을 가지고 갔다. 디저트와 잠옷까지 든 가방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민 가는 사람의 짐 같았다.
물론 제작진(행복추진위원회라고 부른다)의 요구로 많은 것을 버렸지만.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오두막에 남겼지만.
숲속 작은 집에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그램이 표방하듯 자발적 고립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산다는 것, 즉 '삶'은 다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처럼 살 수는 없다.
삶은 캠핑이 아니다.
물은 얼고 하수구는 막히고 방은 춥고 준비한 식재료는 죄 냉동실로 들어간다.
말이 좋아 벽난로지 대개는 불을 때면 방안에 연기가 가득한데, 그렇게 매운 연기는 아마도 미세먼지일 것이다.
#에피소드 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전원의 정취를 풍기는 눈밭 속 언 배추와 가마솥만 있는 게 아니다. 도시에서도 흔하지 않을 식용꽃과 오븐까지 등장한다. 세련된 입식 주방과, 고수들이 쓰는 주방기구도 있다. 음식은 죄다 고급스럽고 정갈하다.
아들이 거실 티브이에 결제해놓은 영화였는데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왔다"는 대사에 꽂혀 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 타지에 나가 사는 주인공은 전자레인지에 인스턴트 식품을 데워서 한 술을 뜨다 도로 뱉어버린다.
그래 그건 쓰레기다.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한 대목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리틀 포레스트>는, 딱 영화였다. 물론 좋은 영화.
영화에 나오는 예쁜 한옥에는 삶이 없다.
잡초와 외풍과 난방과 쓰레기와 정화조 걱정이 없다.
( 아. 그럴싸하게 기와장 몇 개를 덜어내고, 한옥 지붕 고치는 시늉은 한다.)
지인의 시골 집을 '방문'하거나, 주말농장이나 전원주택을 따로 두고 도시를 떠나 잠시 지내다 오는 것을 삶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처럼
밥을 짓고 먹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 손을 부려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골집에서 머랭을 치고 수플레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
밥은 그림이 아니다.
소확행 같은 말장난도 아니다.
셰프가 차려낸 티브이 속 밥상도 아니다.
고단하고 또 지엄한 일이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그 많은 요리들을, 노량진 공시생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성인이 된 주인공이 현실감없게 완벽하게 재현한다. 내용을 모르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내가 주인공이 종국엔 유기농의 셰프 식당을 내게 되는가 하고 짐작할 만큼. (물론 내 짐작은 틀렸고, 내 뻔한 상상력을 배반한 결말이 더 좋긴 했다.)
숲에서 혹은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녹록치 않다.
고된 노동과 시간을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십년 전 쯤 아주 힘든 시기에 친구가 사는 시골읍내에 가서 며칠을 지내고, 친구가 소개한 인적 드문 과수원 집으로 거처를 옮겨 며칠을 더 지낸 적이 있다.
시골은, 시골읍내와도 다르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체험했다.
명상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만큼 몸을 부려서 먹고 살아야 했다.
힘이 들므로 아직은 젊은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월을 따라 곰삭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긴 그 또한 용기일 것이고,
용기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어쩌면 늙은 자의 기우일 수도 있겠다.
젊음은, 시행착오를 만회할 시간이 있기에 눈부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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