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내 꿈은 아니었다.
마흔에 문학공부를 시작했다가 어찌어찌하다 벼락부자(?) 되듯 전임이 되었는데 현기증이 났던 것 같다. 얼마 안 돼 학교가 시끄러울 때 결기있게 사표를 냈다, 고 되어 있으나 실은 도망친 거나 다름없다.
대학의 전임교수라는 게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그만두고 나서야 알았다. 악어의 눈물과 표리부동과 안면몰수와 배신을 질리게 경험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았으면 그 알량한 학부장 자리 지키느라 영혼도 다 팔았을 게다. (박철화 선생은 자신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영혼이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는 표현을 썼다.) 암튼 그때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 했다. 바보 맞는 것 같다. ㅋㅋ (그때 사표를 던지고는, 수강신청도 다 했고 제3강까진가 찍은 수업도 괘씸죄로 폐강됐으니.)
많은 일을 겪었지만 내게 어울리는 수식어도 얻었다.
박사 4차때던가 디지털대학교 제자와 한 강의실에서 석박 통합수업을 들었다. 그 사연을 아는 희곡 전공의 이 모 교수가 '자리의 스위치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아주 흥미롭고 맘에 쏙 드는 수식어를 붙여 나를 묘사해주었다.
하긴. "이래뵈도 내가 왕년에..." 그러면 굶어죽는다.
작가로 먹고사는 것도 진작 포기했다.
재능 없으면 노력이라도 하라고? 재능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재능이 노력...으로 빛을 발할 수는 있어도.
그 동네의 동종번식과 등단 절차에 부여된 계급의식과 (키치 생산자를 키워 먹고사는) 먹이사슬 등의 추한 모습이, 우리 사회 다른 분야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보고 경험한 것으로 나 같이 깨끗한( 여기서 깨끗하다 함은 문학은 supreme한 것이라는 모지리철학을 견지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아서라 말아라 하는 판임은 분명했다. 더러움을 '너무' 많이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본 그 추함이, 혹은 추한 것에 대한 내 취약성이, 순수하고 지고한 것이라 믿었던 나의 맹목 혹은 순진한 소명의식을 無로 돌릴 만큼 컸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러니까 막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포기했거나 채 시작도 하기 전에 떠난 셈이었다. 뭐 이것도 여우의 신포도 같은 허튼소리니 패스.
나는 노력도 안하기로 했다. 당장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절실한 무엇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다 시들해져서 안간힘이라거나 절절함이라거나 하는 덕목들이 우스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 일찍 겉늙어버렸을까.
어린 시절 국가고시를 거쳐 취득해둔 내 면허증으로 먹고살기로 결심했지만 주위에 내가 약국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밝힐 때는 마치 커밍아웃이라도 하듯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그것도 약국을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가능했다.
이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중동에서 약국을 하고 있노라 자연스럽게 나를 소개하고, (여유가 있으니) 뜻 맞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도 많이 사고 고용창출에도 이바지(!)하고 인근은 물론 수원에서 시흥에서 "예쁘장하고 똑부러지는 여자 약사님" 찾는 환자들도 많다는 소릴 스스럼없이 한다. 가끔 근무약사들로부터 "국장님(약국장을 줄인 말이다)은 꼭 교수님 같아요" 라는 말을 듣는데 그건 칭찬이 아니라 흉이지 싶다.^^
왜 안 쓰느냐고?
논문 왜 안 쓰며 학위는 안 받을 거냐고?
다시 가르치고 싶지 않냐고?
왜 내가 그래야 하지?
내겐 지금이 딱 좋다.
연초부터 무슨 변고인지 5번 늑골이 골절되어, 입원한 셈치고 며칠째 약국도 안 나가고 쉬고 있는데 살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운명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시간이 더 흘러 어느 날 내가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언제든 어디로든 자리 이동이 가능할 뿐 아니라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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