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포
손목터널증후군(CPS)은 손바닥 한가운데를 지나는 정중신경이 눌려서 생긴다.
2012년 4월 처음으로 대형마트 강제휴무가 시작되던 날 오른손 인대를 터서 눌린 정중신경을 회복시키는 수술을 받았다.
흔적이 손바닥 손금 끝에 남았다.
통증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저림이다.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이 지속되어 고통스러웠다.
수술 후 저림은 사라졌지만 이미 신경 손상이 많이 진행되었던지 손에 힘이 없고 손목을 비틀어서 따야 하는 병뚜껑 작업은 쥐약이었다. 엄지 아래 통통한 부분은 이미 근육 소실이 많이 진행되어 쭈글쭈글해졌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렸고, 그래서 가위를 떨어뜨려 왼쪽 발가락 두 개가 골절되기도 했다.
...
다시 왼손에 그 익숙하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는 좀 되었다.
지난 봄부터 팔꿈치 통증이 있고, 그러고나면 손끝이 저렸다.
불안이 엄습해서 일을 할 때 되도록 손목이 접히지 않도록 애썼다.
그 노력도 허무하게, 2011년 겨울처럼 증상이 뚜렷해졌다.
근전도검사는 많이 고통스럽다. 대바늘로 겨드랑이를 찌르는 듯 아프다. 그래서 바늘검사라고도 부른다.
검사를 담당했던 의사가 그래도 참 잘 참으시네요 했지만 눈물이 났을 정도다.
수술 후 나흘 정도 입원했었고, 차카게 살자라고 쓰지는 않았지만 퇴원하는 날 깁스실에 가서 손목과 손등을 덮는 깁스를 했었다. 깁스는 열흘쯤 지나 풀었다. 운전을 못해 전철로 출퇴근했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감았다.
그렇게 그해 봄이 다 지나갔다.
손에 수술 자국이 덜 남게 성형외과로 트랜스퍼 해주었던 통증의학과 주치의는 재발할 수 있다고 했고, 왼손에도 생길 수 있으니 관리를 잘하라고 했었다.
십년이 지나 왼손에, 또 약하지만 오른손에도 재발되었으니 관리를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에 <왼손>이란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다.
곧 소설을 접었고, 약국을 시작했다. 삶은 사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흐른 시간만큼 바랜 기억들 속에서 봄날의 병실이 떠오른다.
마취에서 깼을 때 꽃들이 쾌유를 빕니다... 리본을 단 꽃다발이 병실에 왔다.
손에 깁스를 하고 이미 한낮이면 땀이 나기 시작하던 5월의 오후에 올림픽공원에 갔던 기억도.
그때 멈추었어야 했다, 레미콘트럭처럼 살기.
양회 반죽이 굳지 말라고, 쉼없이 움직이며 등에 짊어진 반죽기를 돌려야 하는 레미콘 트럭을 볼 때마다 자학이란 저런 것이군 하고 생각했었다.
내가 자학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만둘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대학교 선생질을 그만둘 때는 딱 한번 온 기회에 곧바로 그만두는 것을 선택했으니, 어쨌든 내가 약국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건 분명히 선택을 미루며 뭉개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 나는 그만두지 않았고, 올해로 십 년째 접어든다.
그만두지 못하는 핑계는 물론 늘 있어 왔다.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서, 대안이 없어서, 일을 좋아해서 등등.
그렇다. 나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레미콘 트럭이 내 앞에 가고 있었는데 문득 내가 저와 같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일을 하는가. 그것도 미치도록 열심히. 때론 휴일도 없이.
기본적인 매출을 유지하려면 내가 일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는 너무 자주 써먹었고 또 너무 뻔해서 어느 날부터는 용도폐기했다. 대신 나는 일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지었다.
밤 11시를 넘긴 시각에도 경인고속도로는 시속 80킬로를 넘을 수 없을 만큼 차량이 많다. 자동차 속의 저들은 다 나 같은 사람들일까. 집 말고, 일터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 일을 핑계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유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배우자로서의 역할을 유기하는 사람들...
그날 나는 알았다. 아니 의식 밖으로 드러냈다. 모르지 않았던,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누르고 있었던, 내가 일(그것도 밤늦은 시각까지 문을 열어야 하는 곳을 택해서)을 하는 진짜 이유.
지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쓸쓸했던 것 같다.
바람 소리를 듣는다.
피아노 전주가 시작되면 벌써 눈물이 난다.
힘들 땐 뒤를 돌아보라고, 거기 서 있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대 등 뒤에서 그네를 올려주는 바람이 못 되었다.
바람이 되지 못하므로 떠날 수는 없고
원하는 대로 스스로 자유롭도록 나는 그저 가만히 있다.
이번 생은 포기했다.